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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더니든이라는 도시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뉴질랜드 남섬의 그저 평범한 소도시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스코틀랜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고풍스러운 도시에, 차로 30분만 나가면 야생 바다사자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기대 없이 왔다가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곳이 된 여행지입니다.

뉴질랜드 더니든

남반구의 에든버러: 더니든의 도시 분위기

더니든은 뉴질랜드 남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뉴질랜드 전체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19세기 중반 스코틀랜드 이민자들이 세운 도시여서 도시명 자체가 에든버러(Edinburgh)의 게일어(Gaelic) 표기에서 유래했습니다. 게일어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켈트족이 사용하던 언어로, 더니든(Dunedin)은 에든버러의 옛 이름 'Dùn Èideann'을 그대로 영문화한 것입니다. 이름부터 역사가 새겨진 도시인 셈입니다.

제가 직접 시내를 걸어보니, 일반적으로 뉴질랜드 도시들이 현대적이고 깔끔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더니든은 그 공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더니든 기차역(Dunedin Railway Station)은 플랑드르 르네상스(Flemish Renaissance)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입니다. 플랑드르 르네상스란 16~17세기 벨기에·네덜란드 지역에서 발전한 건축 양식으로, 붉은 벽돌과 흰 화강암의 대비, 장식적인 탑과 아치가 특징입니다. 실제로 역 앞에 서서 올려다보면 "여기가 뉴질랜드 맞나?" 싶을 정도로 유럽 분위기가 강하게 납니다. 오타고 대학교(University of Otago) 건물들도 고딕 리바이벌(Gothic Revival) 양식이 주를 이루는데, 고딕 리바이벌이란 중세 고딕 건축의 뾰족한 아치와 석조 질감을 19세기에 되살린 양식으로, 캠퍼스 전체가 마치 영화 해리포터 세트장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타고 대학교는 1869년 설립된 뉴질랜드 최초의 대학교입니다(출처: University of Otago). 150년이 넘는 역사를 품고 있다 보니 캠퍼스를 걷는 것만으로도 도시 관광의 절반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숙소에서 도미토리(dormitory)에 묵었는데, 도미토리란 여러 여행자가 한 방에 함께 자는 공용 침실 형태의 숙박 형식입니다. 10년 만에 다시 잡아본 도미토리 침대였는데, 새벽에 화장실 가기도 눈치 보이고 불편한 건 여전했지만,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는 분위기만큼은 그 어떤 호텔도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샌드플라이 베이(Sandfly Bay)를 추천해준 것도 숙소에서 만난 워킹홀리데이(Working Holiday) 학생분이었습니다.

더니든에서 놓치기 아까운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더니든 기차역: 플랑드르 르네상스 양식의 외관, 내부 모자이크 타일이 특히 볼 만함
  • 오타고 대학교 캠퍼스: 고딕 리바이벌 양식의 건물군, 도보 관광 추천
  • 볼드윈 스트리트(Baldwin Street): 기네스 세계기록에 오른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도로
  • 한인 마트: 오랜 이동으로 지쳤을 때 떡볶이 과자 하나가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됩니다

오타고 페닌슐라와 샌드플라이 베이: 야생 바다사자의 서식지

일반적으로 뉴질랜드 야생 동물 관찰 명소라 하면 카이코우라(Kaikoura)를 먼저 떠올리는 분들도 있는데, 제 경험상 오타고 페닌슐라(Otago Peninsula)의 밀도는 그것과 또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오타고 페닌슐라는 더니든 시내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온 반도로, 차로 약 30~40분 거리에 위치합니다. 이 반도 남쪽 끝에 자리한 샌드플라이 베이는 뉴질랜드 바다사자(New Zealand Sea Lion), 학명 Phocarctos hookeri의 주요 서식지 중 하나입니다.

뉴질랜드 바다사자는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바다사자 종 중 하나로, 현재 전 세계 개체 수가 약 10,000마리 수준에 불과합니다(출처: New Zealand Department of Conservation). 이처럼 개체 수가 적은 종을 柵이나 유리창 없이 불과 20m 거리에서 마주치는 경험은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해변으로 내려가 보니, 이런 곳에 왜 굳이 입장료도 없고 울타리도 없나 싶을 정도로 접근이 자유로웠습니다. 모래사장 여기저기에 바다사자들이 대자로 누워 있는데, 처음에는 진짜로 잠깐 "죽은 건가?" 싶었습니다. 그만큼 깊고 태평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암컷 한 마리는 몸을 뒤척이며 모래를 긁어대는 걸 한참 지켜봤는데, 가서 등을 긁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안내판에 명시된 최소 이격 거리(minimum approach distance)인 20m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격 거리란 야생 동물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최소 거리 기준을 의미합니다. 바다사자는 순해 보여도 갑작스럽게 이동할 경우 성인 남성을 압도할 만큼의 순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펭귄 관찰에 대해서는 한 가지 현실적인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미 모래 언덕을 한 번 오르내린 탓에 저녁 시간대에 다시 내려갈 체력이 없었습니다. 샌드플라이 베이의 모래 언덕은 경사가 꽤 가팔라서 내려갈 때는 쉽지만 올라올 때 체력 소모가 상당합니다. 펭귄은 황혼 무렵 바다에서 올라오는 황혼 귀소(dusk return) 행동 패턴을 보입니다. 황혼 귀소란 펭귄이 낮 동안 먹이 활동을 마치고 해가 질 무렵 육지 둥지로 복귀하는 습성을 말합니다. 일몰 약 1시간 전에 도착해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관찰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방법입니다. 저처럼 오전에 모래 언덕을 왕복하고 저녁에 다시 시도하려면 중간에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점, 미리 알고 일정을 짜는 것이 좋습니다.

더니든은 영상 10도 안팎의 기온에 바람이 강한 도시입니다. 시내에서도 파카(parka)를 입은 현지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해안가인 샌드플라이 베이는 체감 온도가 더 낮습니다. 바람막이 점퍼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더니든은 처음엔 그냥 거쳐 가는 도시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도시 자체의 역사적 건축미와 30분 거리의 야생 자연이 이렇게 극명하게 공존하는 곳은 뉴질랜드 전체를 통틀어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타고 페닌슐라까지 하루에 다 소화하려면 시간이 빠듯하니, 가능하면 1박 이상의 여유를 두고 방문하시길 권합니다. 특히 샌드플라이 베이는 오전 동물 관찰과 저녁 펭귄 관찰을 모두 하려면 하루가 꽉 차는 일정입니다. 기대 없이 찾아갔다가 오래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될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ltCy79ztD10&list=PLD7Ss_NVlYEny-0hZyox4domuFigH_EGP&index=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