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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는 2022년 국가 부도(sovereign default)를 선언한 이후 지금도 하루 수 시간씩 전력 공급이 끊기는 블랙아웃(blackout)이 일상화된 나라입니다. 저는 그 어둠 속에서 길을 잃다가 현지인 가족의 마당에서 저녁 한 끼를 대접받았고, 처음에는 그걸 '순수한 인간의 온기'라고 단순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 마음 한쪽이 불편했습니다.
블랙아웃이 만든 풍경: 정전의 현실과 여행자의 낭만화
히카두와 골목을 걷다가 전기가 한꺼번에 꺼지는 경험을 처음 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스마트폰 손전등 하나 켜 들고 낯선 골목을 더듬거리는데, 마당에 촛불을 켜둔 가족이 먼저 손짓을 해왔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 나라 사람들은 정말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대로 마당에 앉아 커리와 로티(roti)를 대접받았습니다. 로티란 밀가루나 코코넛을 섞어 얇게 구워 낸 스리랑카식 플랫브레드로, 현지 가정에서 매끼 빠지지 않는 주식입니다.
그런데 블랙아웃, 즉 전력망 자체가 멈춰버리는 대규모 정전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생존의 문제입니다. 스리랑카 경제 위기 관련 보고에 따르면, 2022년 최악의 위기 시기 동안 하루 최대 13시간까지 단전이 이어졌으며 냉장 보관 식품 손실, 소규모 사업장의 매출 직격 등 서민 경제에 심각한 피해를 미쳤습니다(출처: IMF 스리랑카 경제 보고서).
현지인들이 정전이 되면 자연스럽게 마당에 모이는 것을 두고 '화목한 공동체 문화'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게 절반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섭씨 30도를 훌쩍 넘는 열대 실내에서 선풍기조차 돌지 않는 상황이라면 마당으로 나오는 건 선택이 아니라 생존에 가깝습니다. 이걸 '순박한 공동체 정신'으로만 읽는 건 그들의 고통을 여행자 입장에서 편하게 소비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핵심 포인트:
- 블랙아웃은 단순 불편을 넘어 냉장 식품 손실, 소상공인 피해 등 실질적인 경제 타격을 유발합니다
- 야외 이웃 모임은 더위와 열대 환경이 강제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 여행자가 그 광경을 '아름다운 낭만'으로 해석하는 순간, 현지인의 고통은 배경으로 지워집니다
환대의 이면: 자본 비대칭과 이방인 심리학
제가 직접 겪어보니, 스리랑카 현지에서 외국인 여행자라는 존재는 단순한 이방인이 아닙니다. 경제 위기를 통과 중인 나라에서, 몇 달 치 평균 임금에 해당하는 돈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관광객은 일종의 자본 권력(capital power)입니다. 자본 권력이란 경제적 자원의 불균형에서 발생하는 비대칭적 영향력을 뜻하는 개념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관계의 성격 자체를 바꿔 놓습니다.
스리랑카 가족이 제게 보여준 따뜻함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 환대가 순수한 인간성 하나만으로 설명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외국인 손님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거나 "혹시 도움이 될 만한 연결이 생길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그 안에 섞여 있을 가능성을 이방인 여행자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그날 저녁을 마치고 "한국 기념품이나 과자 몇 봉지를 선물하면 예의 바른 답례가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에어컨 나오는 숙소 방에 들어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제가 그 식탁에서 진 묵직한 부채감을 가장 저렴하게 청산하려 했던 계산이었습니다. 관광 인류학(tourism anthropology) 관점에서 이런 현상은 이미 널리 연구된 주제입니다. 관광 인류학이란 여행이라는 행위가 현지 사회와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인류학적으로 분석하는 학문 분야로, 특히 경제 불평등이 심한 지역에서 '이국적 타자의 소비'라는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룹니다.
스리랑카 관광업이 외화 수입의 핵심 축이라는 점도 이 맥락에서 중요합니다. 스리랑카 관광청에 따르면 2023년 관광 수입이 국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회복세를 타고 있으며, 민간 차원의 자발적 환대 역시 이 거대한 구조 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출처: 스리랑카 관광청(SLTDA)).
자체 발전기와 감상주의: 현지인 고통을 안전하게 소비하는 방식
여기서 제가 가장 부끄러웠던 대목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정전이 잦은 지역을 여행할 때 숙소에 자체 발전기(generator)가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실용적인 조언임에는 분명합니다. 제너레이터(generator)란 외부 전력 공급이 끊겼을 때 자체적으로 전기를 생산해 숙소를 가동시키는 비상 발전 장치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현지인들의 촛불 공동체에서 '진짜 행복의 온기'를 건져 올렸다고 감격해 놓고, 정작 본인 몸은 현지인들이 꿈도 꾸지 못할 발전기 구비 숙소로 도망치라고 조언하는 것은 꽤나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이런 소비 방식을 빈곤 포르노(poverty porn)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빈곤 포르노란 타인의 결핍과 고통을 감동적인 이야기 소재로 소비하면서, 정작 그 고통의 구조적 원인이나 자신의 특권적 위치는 외면하는 태도를 비판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저는 그날 저녁을 즐겼습니다. 음식도 맛있었고, 가족분들도 진심으로 따뜻했습니다. 그 감정 자체는 거짓이 아닙니다. 다만 그 감동을 블로그 글 한 편으로 깔끔하게 포장해 '스리랑카 여행의 진수'로 제시하기 전에, 그 촛불이 켜진 이유가 무엇인지를 한 번 더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스리랑카 여행에서 현지인의 환대를 경험했다면, 그 온기를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을 단순한 감동 스토리로만 소비하는 것과, 그 뒤에 있는 경제 구조와 인프라 실패를 함께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여행입니다. 스리랑카를 다시 간다면, 저는 그 차이를 조금 더 의식하면서 걷고 싶습니다. 그게 그분들의 식탁에 대한 더 정직한 예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2p8CB9EXg0w&list=PL-XfG1IjZlqwGKWvwiBwlGt6Dlmv6m_jV&inde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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