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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기준 1달러에 200루피였던 스리랑카 루피화가 불과 몇 달 만에 370루피까지 치솟았습니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환율 붕괴입니다. 콜롬보 마트 매대 앞에서 계란 한 판 가격표를 들여다보다가 저는 문득 불편한 질문을 하나 마주했습니다. 이 나라의 비극 앞에서 지금 저는 여행자입니까, 아니면 수혜자입니까.

루피 폭락이 만들어 낸 수입품 공백과 물가 역전

스리랑카의 외환 보유고(Foreign Exchange Reserve)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습니다. 외환 보유고란 국가가 수입 결제나 외채 상환에 쓸 수 있는 달러 등 외화 자산 총량을 의미합니다. 당시 스리랑카의 외환 보유고는 약 2조 원 수준에 불과했는데, 연내 상환해야 할 외채는 9조 원, 향후 6개월 내 갚아야 할 금액은 35조 원에 달했습니다. 어떤 경제학적 계산을 대입해도 디폴트(채무 불이행)는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콜롬보 카기스 슈퍼마켓에 들어섰을 때, 진열대는 얼핏 채워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수입 가공식품 자리는 텅 비어 있고, 현지 브랜드 제품들이 간격을 넓혀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500ml 우유 한 팩이 1,800루피, 계란 10개에 2,600루피 수준이었는데, 이는 현지 평균 월급 15만원을 적용하면 월급의 8%를 달걀 한 판에 쏟아붓는 셈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분석에 따르면 스리랑카는 GDP 대비 외채 비율이 이미 임계치를 훨씬 초과한 상태였으며, 수입 의존형 경제 구조가 환율 충격을 증폭시키는 핵심 원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출처: 국제통화기금). 솔직히 수치로만 보면 막연하게 느껴졌던 위기가, 매대 앞에서 물건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현지 주민들의 손동작을 보는 순간 갑자기 살갗에 닿는 온도로 바뀌었습니다.

체험 서사의 위선: 탈출 티켓을 쥔 자의 '24시간 생존'

콜롬보 여행기를 '1일 생존 체험'이라는 타이틀로 엮는 시도가 얼마나 근본적으로 기만적인지, 저는 귀국 비행기 탑승권을 예약해 둔 상태로 거리를 걷는 내내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이 불편함을 솔직하게 꺼내야 할 것 같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모럴 해저드란 손실을 최종적으로 자신이 부담하지 않아도 될 때 위험 감수 행동이 왜곡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달러 신권이 지갑에 있고, 언제든 카드 한 장으로 럭셔리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는 여행자가 '현지인처럼 하루를 버텨봤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모럴 해저드의 감정 버전에 해당합니다. 최악의 상황이 와도 저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주유소 앞에 늘어선 툭툭 행렬은 몇 시간째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연료 배급제가 도입되었다 해도 기름 자체가 없으면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줄을 사진 한 장으로 기록하고 픽미(PickMe) 앱을 열어 이동을 예약했습니다. 그 행위 자체가, 제가 '체험'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과 실제 제가 처한 조건 사이의 간격을 말해줍니다. 제 경험상 이 간격을 인정하지 않은 채 쓰는 여행기는, 아무리 묵직한 단어로 채워도 결국 관광 자본주의(Tourism Capitalism)적 소비물에 불과합니다.

달러 신권 팁이 숨긴 자본 이중성

여행 팁으로 "빳빳한 달러 신권을 챙겨라"고 조언하는 것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구조가 보입니다. 달러 신권을 현지 환전소에서 스리랑카 루피로 바꾸는 행위는, 루피화 가치가 붕괴된 덕분에 같은 돈으로 훨씬 많은 것을 구매할 수 있다는 현실을 전제로 합니다. 구매력 평가(PPP, Purchasing Power Parity)란 서로 다른 통화 간에 실질적인 구매력을 비교하는 지표입니다. PPP 기준으로 보면 외국인 여행자는 현지 통화 붕괴를 그대로 할인 쿠폰처럼 누리는 구조입니다.

저는 400루피짜리 면도 서비스가 1,600원이라는 데 "완전 거저"라고 느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의 감정이었습니다. 저렴하다는 만족감이 올라오는 동시에, 그 저렴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떠올리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공존했습니다. 현지 이발사 입장에서 400루피는 며칠 전보다 실질 가치가 이미 반토막 난 금액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조적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스리랑카는 탄탄한 제조업 기반이 없어 달러 수입원이 관광업, 실론 홍차 수출, 해외 이주 노동자 송금 세 가지에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관광객이 끊기면서 달러 수입이 급감했고, 연료와 식료품 수입 비용은 글로벌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오히려 치솟았습니다.
  •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자 루피화 약세가 가속되었고, 이는 다시 수입 물가 폭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Vicious Cycle)이 고착되었습니다.

세계은행(World Bank)이 2022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스리랑카의 1인당 GDP 대비 외채 부담은 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구조적 취약성이 오랜 기간 누적되어 온 결과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출처: 세계은행).

관광자본의 시선으로 읽는 콜롬보: 빈부 격차와 방관자의 자리

콜롬보의 스카이라인은 솔직히 말해 서울 어느 부도심을 걷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고급 레지던스, 복합 쇼핑몰, 수영장까지 갖춘 그 건물들이 주유소 줄과 같은 도시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기괴했습니다. 소득 불평등 지수인 지니 계수(Gini Coefficient)로 보면, 스리랑카는 경제 위기 이전부터 이미 상당한 수준의 양극화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지니 계수란 0에 가까울수록 평등, 1에 가까울수록 극단적 불평등을 의미하는 소득 분배 지표입니다.

마트에서 예거 750ml 양주 가격은 한화 8만 5천 원 수준이었습니다. 현지 평균 월급이 15만 원인 현실에서, 이는 한국 월급쟁이가 150만 원짜리 술을 사는 격입니다. 저는 그 가격표 앞에서 꽤 오래 서 있었습니다. 제가 봤을 때 이 장면은 경제 위기가 단순히 국가 재정 문제가 아니라 이미 개인의 존엄과 여가와 선택의 자유를 어떻게 박탈하는지를 보여주는 정직한 단면이었습니다.

에그 호퍼 두 개에 800원짜리 저녁을 먹으면서 저는 이 음식이 맛있다는 것 이상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쌀가루와 코코넛 밀크로 반죽한 이 음식은 원래 가난한 노동자들이 고열량·고단백을 저렴하게 섭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영국의 피시 앤 칩스가 노동자의 음식에서 전통 음식으로 격상된 것처럼, 에그 호퍼도 지금은 스리랑카의 정체성이 된 음식입니다. 그 역사를 알고 나면 이 800원짜리 저녁이 단순한 가성비 식사가 아닌, 이 나라 사람들의 오랜 결핍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스리랑카에서 하루를 보내며 확인한 것은, 경제 위기는 수치가 아니라 사람들의 손동작과 표정과 침묵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달러 신권을 꽉 쥐고 환율 우대를 받으며 걷는 이방인의 시선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편향되어 있는지를 먼저 인정하는 것, 그것이 이 나라를 여행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첫 번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콜롬보를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환율 계산기보다 먼저 그 질문을 꺼내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경제 또는 금융 조언이 아닙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vvUOt2EBzVA&list=PLMjqfhTwlSL2V-iiPkWdgsN_hyE-Gmh4P&index=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