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여행 계획을 짜면서 "이 도시 어디를 가야 하지?"라며 검색 탭을 열심히 뒤적인 경험, 다들 있으시죠? 저도 세비야 앞에서 똑같이 쩔쩔맸습니다. 막상 발을 들여놓으니 검색 결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눈앞에 쏟아졌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가 뒤섞인 왕궁, 압도적인 스케일의 광장, 그리고 구시가지 한복판을 뚫고 솟은 이질적인 현대 건축물까지. 설레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던 세비야의 반나절을 솔직하게 풀어봅니다.

알카사르 궁전, 줄 서는 것도 전략입니다
혹시 인기 관광지에서 긴 줄을 보고 "내가 타이밍을 놓쳤구나" 하고 자책해 본 적 있으십니까? 세비야의 알카사르 궁전(Real Alcázar de Sevilla)은 그 자책이 현실이 되는 곳입니다. 제가 직접 가보니 오전 9시 30분 첫 타임 예약 줄도 이미 제법 길게 늘어서 있었고, 잠깐 망설이는 사이 뒤로 인파가 더 쌓이는 걸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더군요.
알카사르는 10세기 이슬람 왕조가 건설한 왕궁으로, 이후 기독교 국가인 카스티야가 세비야를 정복한 뒤에도 허물지 않고 계속 왕궁으로 사용한 곳입니다. 여기서 무데하르(Mudéjar) 양식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무데하르 양식이란 이슬람 장인이 기독교 왕조 치하에서 작업하면서 탄생한 건축 양식으로, 아라베스크 문양과 기독교적 구조가 한 공간 안에 공존하는 독특한 형태를 말합니다. 천장과 벽면을 가득 채운 기하학적 타일 문양 앞에 서면 말이 안 나옵니다. 제가 직접 서봤는데, "와"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곳이 지금도 스페인 국왕이 세비야 방문 시 실제로 머무르는 공식 왕실 거처라는 점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생활 공간이라는 게 참 묘한 기분을 줍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아름다움보다 피로감이 먼저 온 순간도 있었습니다. SNS용 인생샷을 건지려는 사람들로 가장 아름다운 정원 구역이 사실상 전쟁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알카사르를 조금 더 여유롭게 즐기기 위한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오전 첫 입장 시간(9시~9시 30분) 온라인 사전 예매 필수
- 입장 후 가장 인기 있는 구역으로 지체 없이 직진
- 정원 구역은 상대적으로 여유롭기 때문에 후반부에 천천히 둘러볼 것
스페인 광장, 기대가 클수록 현실도 커집니다
여러분은 광고 한 편에 한 도시의 이미지가 통째로 각인된 경험이 있으십니까? 우리나라에서 세비야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ña)이 유명해진 데는 배우 김태희 씨가 빨간 드레스를 입고 플라멩코를 추던 CF 촬영지라는 사실이 한몫했습니다. 저도 그 장면을 머릿속에 넣고 광장 앞에 섰는데, 실제로는 상상했던 것보다 세 배쯤 큰 규모에 먼저 압도되었습니다.
스페인 광장은 1929년 스페인-아메리카 박람회(Exposición Iberoamericana)를 위해 건설된 반원형 광장입니다. 스페인-아메리카 박람회란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역사적·문화적 유대를 재확인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 행사로, 이 광장이 그 핵심 무대였습니다. 건물 외벽을 따라 스페인 각 지역의 역사적 사건을 표현한 아줄레호(Azulejo) 타일 벽화가 이어지는데, 아줄레호란 포르투갈과 스페인 전통의 채색 도자기 타일을 뜻하며, 세비야 건축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대표 장식 기법입니다. 각 도시 패널 앞에서 해당 지역 이름을 하나씩 읽으며 걷다 보니 은근히 시간이 잘 갔습니다.
다만 제 경험상 이건 좀 준비가 필요합니다. 낮 시간에 광장 한복판은 피할 그늘이 거의 없어서 강렬한 햇볕이 그대로 쏟아집니다.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전에 탈출 본능이 먼저 올라올 수 있습니다. 광장 인공 운하의 물이 가뭄 탓인지 많이 줄어 있었던 것도 아쉬웠습니다. 물이 가득 찼다면 반원형 건물이 수면에 반사되는 장관이 연출됐을 텐데, 제가 방문했을 당시는 그 매력을 절반쯤밖에 누리지 못한 것 같아 천추의 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세비야의 연간 관광객 수는 스페인 관광청 통계 기준으로 수백만 명에 달하며, 스페인 광장은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핵심 방문지입니다(출처: 스페인 관광청). 낮과 밤 풍경이 완전히 다른 곳이라, 여건이 된다면 해 지고 나서 노란 조명이 켜질 때 한 번 더 방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메트로폴 파라솔, 충격과 감탄 사이
세비야 구시가지를 걷다가 갑자기 거대한 버섯 떼를 마주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저는 솔직히 처음엔 당황했습니다. 메트로폴 파라솔(Metropol Parasol)은 세계 최대 규모의 목조 구조물로, 현지인들은 그 생김새 때문에 '엔카르나시온의 버섯들(Las Setas de la Encarnación)'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파라솔(Parasol)이란 해를 가리는 차양을 뜻하는데, 이 건축물의 물결치는 격자 구조가 실제로 광장 아래 그늘을 만들어 주는 기능도 겸합니다.
제가 직접 올라가보니 세비야 일몰 명소라는 명성은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구불구불한 옥상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붉게 물드는 세비야 구시가지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저는 5시 45분 예약이었는데, 9분 일찍 입장을 시도해 통과했습니다. 전망대 위는 생각보다 좁아서 일몰 정각에 올라가면 앞사람 뒤통수만 보게 될 수 있으니, 넉넉히 30분 전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는 것이 현명합니다.
다만 이 건물이 유서 깊은 세비야 구시가지와 조화를 이루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중세 붉은 기와지붕들 위로 거대한 현대 목조 구조물이 솟아 있는 장면은, 좋게 말하면 역사와 현재의 대화이지만 솔직히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도시 미관에서 말하는 경관 일체성(Townscape Coherence), 즉 도시 구성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정도라는 개념에서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저녁 7시 이후 LED 쇼가 시작되면 구조물 전체가 빛으로 물드는 광경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세비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지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알카사르 궁전과 세비야 대성당이 그 핵심 구성 요소입니다(출처: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 이런 맥락에서 메트로폴 파라솔이 세워질 당시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은 실제로 방문해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됐습니다.
세비야의 하루는 생각보다 길고, 생각보다 무겁습니다. 알카사르의 정교한 문양 앞에서 감탄하고, 스페인 광장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되고, 메트로폴 파라솔 위에서 붉게 타는 도시를 내려다보고 나면, 이 도시가 왜 안달루시아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불리는지 몸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아쉬움조차 세비야를 한 번 더 오고 싶게 만드는 이유가 되더군요. 다음 세비야 방문 때는 반드시 물이 가득 찬 스페인 광장 운하 위에서 나룻배를 타보겠다는 다짐을 안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1keHGtsE8Y&list=PLD7Ss_NVlYEk4EHCDiIi3WVR3FAII2Dqo&index=8
- Total
- Today
- Yesterday
- 남섬 여행
- 유럽기차여행
- 뉴질랜드여행
- 런던여행
- 호주여행
- 발리여행
- 남섬여행
- 료칸
- 뉴질랜드 여행
- 인피니티풀
- 스페인여행
- 발리 여행
- 오키나와여행
- 유럽여행
- 유럽 기차 여행
- 일본여행
- 튀르키예여행
- 가이세키
- 이탈리아여행
- 동남아여행
- 싱가포르여행
- 파리여행
- 호캉스
- 퀸스타운
- 호시노 리조트
- 홋카이도 료칸
- 스페인 여행
- 우붓 리조트
- 뉴질랜드 남섬
- 렌터카여행
|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 1 | 2 | 3 | 4 | 5 | 6 | |
| 7 | 8 | 9 | 10 | 11 | 12 | 13 |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 28 | 29 | 3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