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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크라이스트처치는 기대가 낮은 도시였습니다. 퀸스타운의 압도적인 풍경을 보고 왔으니, 마지막 도시는 그냥 비행기 타기 전 경유지 정도겠거니 했거든요. 그런데 에이번 강변을 걷다 야생 뱀장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 도시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뉴질랜드 남섬의 마지막 밤을 보낼 도시로, 크라이스트처치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에이번 강이 품은 야생 생태계, 그 실제 모습

뉴질랜드 남섬 여행에서 야생동물 관찰이라고 하면 보통 피오르드랜드(Fiordland) 국립공원이나 카이코우라(Kaikoura) 해안 같은 오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피오르드랜드란 빙하가 깎아낸 깊은 협곡에 바닷물이 채워진 지형으로, 독보적인 생태계를 자랑하는 보호구역입니다. 그래서 저도 크라이스트처치 도심 한복판의 에이번 강에서 야생동물을 제대로 만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청둥오리가 사람 발치를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고, 조금 더 들여다보면 수면 아래 두꺼운 몸통이 움직이는 게 보입니다. 뉴질랜드 민물 뱀장어인 투나(Tuna)입니다. 투나란 마오리어로 뱀장어를 가리키는 말로,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에게는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생물입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그 굵기가 성인 팔뚝을 훌쩍 넘을 정도였는데, 가만히 기다리니 두 마리, 세 마리가 잇달아 나왔습니다. 연어도 함께 유영하는 장면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도심 하천은 수질 오염과 인간 활동으로 생태계가 훼손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에이번 강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뉴질랜드 환경부(Department of Conservation)는 민물 뱀장어를 생태계 지표종으로 분류하고 보호 관리 중인데, 그 노력이 도심 강에서도 고스란히 체감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출처: 뉴질랜드 환경부).

에이번 강 생태 관찰 시 알아두면 좋은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뱀장어는 강 바닥 돌 틈에 숨어 있다가 오전이나 해질 무렵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 연어와 뱀장어가 같은 구역에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서로 접촉하지 않고 영역을 나눕니다.
  • 야생동물이므로 먹이 투여나 직접 접촉은 생태계 교란 행위에 해당합니다. 관찰만 하는 것이 기본 매너입니다.

빈티지 트램, 타야 할까 말아야 할까

크라이스트처치의 빈티지 트램은 도시 관광 마케팅의 핵심 자산입니다. 클래식한 외관의 트램이 도심 광장을 가로지르는 풍경은 실제로 꽤 아름다웠고, 저도 처음 보자마자 "이거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티켓을 알아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크라이스트처치 트램은 시티 사이트씨잉(City Sightseeing)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시티 사이트씨잉이란 도심 주요 관광지를 순환하며 자유롭게 승하차할 수 있는 홉온홉오프(Hop-on Hop-off) 관광 노선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가격이 1일권(All Day Pass) 기준 35뉴질랜드 달러로 단일 옵션만 있다는 점입니다. 1회 탑승권 같은 게 없어서, 오후 4시 즈음에 도착한 저 같은 상황에서는 사실상 본전을 뽑기가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관광 트램은 "탑승 경험 자체가 값어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크라이스트처치 도심은 도보 접근성이 워낙 좋아서 트램 없이도 핵심 지역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습니다. 캔터베리 박물관(Canterbury Museum), 해글리 파크(Hagley Park), 에이번 강변 산책로, 리스타트 몰(Re:START Mall)이 반경 1km 이내에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리스타트 몰이란 2011년 크라이스트처치 대지진 이후 컨테이너 박스로 재건한 임시 쇼핑 구역으로, 재건 과정에서 탄생한 독특한 랜드마크입니다.

뉴질랜드 통계청(Stats NZ)에 따르면 크라이스트처치는 뉴질랜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도심 관광 권역은 매우 컴팩트하게 설계되어 있어 도보 관광이 가장 효율적인 이동 방식으로 꼽힙니다(출처: 뉴질랜드 통계청). 빅토리아 여왕 동상 앞에서 트램이 지나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사진 한 장 찍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크라이스트처치 트램 탑승 여부 판단 기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오전 일찍 도착해서 하루 종일 이동 위주로 관광할 계획이라면 35달러가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 오후 늦게 도착하거나 도보 산책이 가능한 컨디션이라면 트램은 패스하고, 강변 생태 관찰에 시간을 더 쓰는 쪽이 낫습니다.
  • 트램을 타지 않더라도 도심 어디서든 트램과 마주칠 수 있으니, 인증샷은 충분히 건질 수 있습니다.

남섬 여행의 마지막 밤은 한국 식당에서 김치찌개 한 그릇으로 마무리했습니다. 퀸스타운에서 빌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반납하는 편도 렌터카 운영이 가능하다는 점도 뉴질랜드 여행의 특징인데, 추가 요금 없이 깔끔하게 반납이 됐습니다. 다음 날 오클랜드행 국내선에 오르면서 남섬을 돌아봤을 때, 크라이스트처치는 화려하진 않지만 여행의 끝을 정리하기에 딱 맞는 도시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기대가 낮았기 때문인지,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곳이 됐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PvPgBOMlSQ&list=PLD7Ss_NVlYEny-0hZyox4domuFigH_EGP&index=18